와인 레이블이나 생산자 설명을 보다보면 “Unfiltered|무여과|“, “Unfined|무청징|“라는 표현을 종종 볼 수 있다. 얼핏 보면 둘다 와인을 깨끗하게 걸러내지 않았다는 의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양조 공정을 뜻하고, 각각의 공정을 생략했을 때 쓰는 문구이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와인이 발효가 끝났다고 해서 바로 맑고 투명한 액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한다. 발효 과정에서 만들어진 효모 세포, 포도 껍질과 과육에서 나온 입자들, 단백질, 폴리페놀 등 여러 물질이 와인 안에 남아 있을 수 있다. 숙성이 진행되면서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가라 앉지만, 병입 시점까지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성분도 있다.
그래서 생산자들은 그대로 병에 넣을 수도 있거나 청징이나 여과를 통해 제거하는 방법을 쓴다. 즉, 와인을 병입하기 전 어느 정도까지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양조자의 선택에 있다.
Unfined・무청징 |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와인 양조에서 Fining은 와인 안에 떠 있거나 용해되어 있는 단백질, 효모 찌꺼기, 불안정한 성분을 다른 결합 가능한 물질을 이용해 더 큰 입자로 만든 뒤, 침전시켜 제거하는 과정이다.
발효와 숙성이 끝난 뒤, 와인을 보다 안정적인 상태로 만들기 위한 공정이다. 대표적인 청징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Bentonite — 주로 단백질 안정화에 사용
- Gelatin — 페놀성 화합물 및 탄닌의 일부를 제거하는 데 사용
- Egg white (Albumen) — 특히 레드 와인의 거친 탄닌을 부드럽게 하는 목적으로 사용
Unfined는 말 그대로 Fining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청징제를 사용해 와인을 정리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Unfiltered・무여과 |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Filtration은 기본적으로 물리적인 분리 과정을 뜻한다. 미세한 입자나 잔여 효모를 필터를 통과시켜 입자나 미생물 등을 크기에 따라 제거한다는 뜻이다. 사용하는 필터의 종류와 공극 크기에 따라 목적이 달라진다.
Fining은 특정 성분과 반응하거나 결합시켜 침전시키는 과정이고, Filtration은 물리적으로 와인을 필터를 통과시키는 과정이다. 와인을 더 맑게, 더 안정적으로, 그리고 병입 후 변화 가능성을 줄이기 위함이다.
Unfiltered는 최종 와인을 필터를 통과시키는 Filtration 공정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와인 안에 미세한 입자나 효모 성분이 일부 남아 있을 수 있다. 이 때문에 병 바닥에 침전물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원래부터 숙성 잠재력이 있는 레드 와인에서도 색소와 타닌이 결합한 Phenolic sediment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다는 점. 즉, 침전물이 있다고 해서 모두 Unfiltered 와인은 아니다.
왜 굳이 여과나 청징을 하지 않을까?
Unfiltered ・ Unfined가 선택되는 이유는 와인메이커 마다 다르지만 그 와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와인’의 의미는 아니다. 마지막 단계에서 개입을 줄였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➊ 이미 충분히 맑고 안정적인 와인
와인이 긴 시간 동안 탱크나 배럴에서 숙성되면서 자연스럽게 안정화되었다면, 굳이 추가적인 청징이나 강한 여과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소규모 생산자들은 와인의 상태를 오랜 기간 관찰하면서 병입 시점을 결정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침전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➋ 와인의 phenolic structure를 지나치게 건드리지 않기 위해
특히 레드 와인에서는 타닌과 색소를 포함한 다양한 페놀성 성분이 와인의 구조와 질감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떤 와인에서는 적절한 청징이 거친 타닌을 정리해 더 좋은 균형을 만들어줄 수 있는 반면, 어떤 와인에서는 청징이 페놀성 성분을 제거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수 있기 때문에, 와인 생산자는 원하는 스타일에 따라 굳이 청징을 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➌ 미세한 colloidal material을 남기기 위해
와인에는 눈에 보이는 고형물뿐 아니라 매우작은 콜로이드 입자도 존재한다. 이러한 성분들이 와인의 mouthfeel이나 향의 지속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생산자가 강한 정제 과정을 피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숙성이 길었거나, 자연 침전이 충분히 이루어진 와인의 경우 추가적인 정리가 필요 없다고 판단하는 생산자도 많다. 즉, 이 선택은 현재 와인의 상태에 대한 판단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고, 의도적으로 원하는 스타일을 얻기 위해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 샤르도네(Chardonnay)에서는 Unfiltered가 단순한 ‘생략’이 아니라 스타일을 만드는 선택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맑고 반듯한 완성”보다 질감의 밀도(texture), 미세한 입자감, 숙성 향의 층위를 남겨 와인이 조금 더 입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만들고 싶을 때다.
이 흐름은 단순히 ‘내추럴’과 동일한 결이라기보다, 산화·숙성·말로락틱(MLF) 등 이미 충분히 스타일이 형성된 와인을 마지막에 과하게 정리하지 않는 방식에 가깝다. 그래서 어떤 와인에서는 Unfiltered가 “덜 만든 와인”이 아니라, 마무리에서 질감의 결을 남기려는 미학적 선택으로 읽히기도 한다.
Unfiltered가 곧 더 좋은 와인이라는 공식은 없다.
여과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항상 더 깊은 맛이 생기는 것은 아니고 청징을 생략했다고 해서 균형이 더 좋아진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여과를 하지 않으면 와인에 미세한 고형물, colloidal material, 효모 유래 성분 등이 일부 남아 잘 숙성된 와인에서는 이런 성분이 texture와 mouthfeel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다. 생산자가 원하는 것이 아주 깨끗하고 날카롭게 정리된 스타일보다 넓고 밀도 있는 texture라면 여과를 생략하는 선택이 의미가 생긴다.
Fining은 단순히 탁한 물질을 제거하는 과정이 아니라, 사용하는 청징제에 따라 phenolic compounds, tannins, proteins 등 와인의 구성 성분 일부를 함께 제거할 수 있다. 따라서 생산자가 와인의 구조와 질감을 충분히 좋다고 판단한다면 청징을 하지 않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
Wine Folly · Filtered vs Unfiltered Wine: Which is Better?
부르고뉴 | 피노 누아, 샤르도네
부르고뉴에서는 특히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에서 Unfined 혹은 Unfiltered가 비교적 자연스럽게 사용된다.
이 지역의 와인들은 향이 섬세하고 질감의 미묘한 변화가 주 캐릭터인 품종들로, ‘과도한 정리’로 사라질 수 있는 뉘앙스가 생길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부 생산자들은 이미 충분한 침전과 숙성이 이루어졌다고 판단되면, 청징이나 여과를 최소화하거나 생략해 질감과 향의 결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선택을 한다. 이때, 와인은 향이 조금 더 천천히 열리거나, 입안에서 질감이 더 입체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Pinot Noir처럼 tannin과 phenolic structure가 와인의 섬세한 질감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와인에서 생산자가 이미 충분히 부드럽고 균형 잡힌 타닌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청징을 통해 추가로 제거할 이유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캘리포니아
Chardonnay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특히 고급 화이트 와인에서는 질감과 향의 복합성을 만들어주기 위해 양조 과정에서 배럴 발효, 리 숙성, 바토나주가 이루어지는데, 이를 통해 숙성이 충분히 되면 생산자가 와인을 강하게 정제하지 않고 병입한다. 와인이 조금 더 textural하고 layered한 인상을 보일 수 있다. 와인의 질감과 숙성에서 오는 복합성을 최대한 유지하겠다는 선택이다.
숙성이 충분히 진행된 후 생산자가 와인을 강하게 정제하지 않고 병입하면, 와인이 조금 더 textural하고 layered한 인상을 보일 수 있다.
특히 California의 일부 Chardonnay 생산자들에게서 Unfiltered라는 표현은 단순히 “필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기술적 정보 이상으로, 와인의 질감과 숙성에서 오는 복합성을 최대한 유지하겠다는 스타일적 선택으로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생산자마다 다르다.
모든 California Chardonnay가 Unfiltered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고, Unfiltered가 California Chardonnay의 품질을 판단하는 기준도 아니다.
론 밸리 & 남부 프랑스 | 시라, 그르나슈
론 밸리, 특히 남부 론이나 랑그독 같은 지역에서는 시라, 그르나슈 베이스의 와인에서 종종 등장한다.
이 스타일의 와인들은 과실의 밀도가 높고, 향신료, 허브 계열의 풍미가 특징이며 비교적 넉넉한 바디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 과도한 여과로 이 질감이 지나치게 가벼워 질 수 있다고 판단되면, 와인의 무게감과 입안에서의 밀도를 유지하기 위해 여과를 줄이는 선택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 경우, 맛은 더 둔중하거나 진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동시에 다소 거칠게 느껴질 여지도 함께 생긴다.
이탈리아 & 스페인 | 산지오베제, 템프라니요
이탈리아의 산지오베제, 스페인의 템프라니요에서도 Unfiltered ・ Unfined 와인이 종종 등장한다. 이 지역과 품종에서는 와인의 구조와 산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청징 과정에서 구조감이 행여 약해지지 않도록 무청징 선택을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산도는 더 또렷하게 느껴지거나 질감을 조금 더 직선적으로 드러내는 와인으로 출시할 수 있다.
내추럴 와인 & 최소 개입 스타일
내추럴 와인이나 최소 개입|minimal intervention|을 지향하는 와인 생산자들에게서도 자주 등장한다. 이 경우에는 공정을 최소화하고, 병입 전 개입을 축소함으로써 변화 가능성을 감수한다는 의미가 더 많다. 이 지점에서는 스타일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이 표현만으로 와인의 성격을 예측하기는 어려우므로 다른 정보들과 함께 고려해봐야 알 수 있다.
실제로 마실 때 무엇을 기대하면 될까?
짧게 요약해야 한다면, 물론 모든 와인에 적용되는 공식이 아니지만 Unfiltered ・ Unfined 와인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날 수 있다.
- 병 바닥에 침전물이 남아 있을 수 있다.
- 개봉 직후 향이 다소 닫혀 있다가 시간이 지나며 풀리는 경우도 있다
- 질감이 조금 더 둔하거나, 반대로 더 밀도 있게 느껴질 수도 있다